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문단 편집) == 여담 == 아들 [[로버트 A. 태프트]]는 오하이오 주 연방 상원의원 3선을 기록했으며 1952년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에서는 2차대전의 전쟁영웅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와 대결하여 패배했다. 공화당이 집권하면서 로버트 태프트는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에 선출되어 집권당의 1인자가 되었지만... 암이 온몸에 퍼진 게 발견됐고 얼마 못 가 사망했다. 강경한 보수 성향으로, 특히 그가 1947년에 공화당 의원들과 [[남부 민주당원|민주당 내 남부보수파]] 의원들의 연합체인 [[보수연합]]의 지원에 힘입어 트루먼 대통령의 반대를 뚫고 추진한 태프트-하틀리법(Taft-Hartley Act)[* 사용자 뿐만 아니라 노조도 부당노동행위 주체로 인정하였고, 노조의 취업독점권인 Closed shop을 폐지하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은 좌파 진영으로부터 미국 노동관계법 역사상 최악의 법으로 비난받기도 한다. 증손자인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4세는 국방차관(1984~1989), 주미 나토 대사(1989~1992), 국무부 법률 고문(2001~2005)을 지냈다. 태프트가 대통령 선서를 한지 두 달 후, 아내인 넬리[* 본명은 헬렌 루이즈 헤론(Helen Louise Herron)으로 결혼한 뒤 헬렌 루이즈 해론 태프트가 되었다. 자서전을 쓴 최초의 [[퍼스트 레이디]]로,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재클린 케네디]]와 함께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된 유이한 "퍼스트 레이디"다.]는 갑자기 중풍에 걸려 몸의 일부가 마비되었으며 몇 년 후에야 회복될 수 있었다. 이런 와중에 넬리는 포토맥 강변에 일본에서 온[* 당시 일본은 일찌감치 미국과 친교하는 정책을 시작했었다.] 벚꽃 나무들을 심었다. 진주만 공격 직후에 그 나무들을 뽑아 버리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뽑지 않았고, 그 나무들은 지금도 봄마다 벚꽃을 피운다. [[파일:external/i.telegraph.co.uk/1911_1443742i.jpg]] 미국 대통령 중 최초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시구(야구)|시구]]를 한 대통령이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체중]]이 많이 나가는 대통령이었음을 생각하면 아이러니. 태프트는 유럽 정세에 빠삭한 외교관인 주 프랑스 대사 헨리 화이트를 조기에 해임해버렸다. 그 이유란 25년 전에 태프트와 아내인 넬리가 프랑스에 신혼 여행을 갔을 때에 화이트가 그들을 박대한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와는 처음에는 친밀했지만 태프트가 대통령이 되면서 사이가 틀어졌다. 하지만 1919년 루스벨트가 죽자 장례식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그날 비가 왔는데도 루스벨트가 안장되고 난 후에도 오랫동안 그의 묘를 떠나지 못하고 멍하니 쳐다봤다고 한다. 애증의 사이였던 듯하다. [[타이타닉 침몰 사건]] 당시 [[미국 대통령|대통령]]이 바로 태프트였다. 대통령 자리에 있었을 적에 찰스 에반즈 휴즈를 대법관에 임명하면서 대법원장 자리가 비면 대법원장으로 올려주겠다고 약속했다가 바꿨다. 이유는 47세 밖에 안 된 휴즈가 연방대법원장으로 올라가면 오랫동안 있을테니 자긴 대법원장 자리엔 못 앉게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65세의 대법관이었던 에드워드 더글라스 화이트를 대신 임명했다.[* 재밌게도 태프트는 공화당 소속이지만 에드워드 화이트은 민주당 당적이었다.] [[https://youtu.be/5cDfWC2aVSY?t=43m45s|화이트는 다행히도(?) 적절한 시기에 죽어주어서 (로버츠 대법원장은 "After White died on schedule"이라는 표현을 썼다.)]] 하딩 대통령의 지명을 받고 9년간 자신이 그렇게 바랬던 꿈의 직업에서 일하게 되었다. 태프트의 욕심 때문에 대법원장에 못 올라갔던 휴즈도 [[허버트 후버]] 대통령의 지명을 받아서 1930년에 대법원장으로 승진해서 11년간 지냈으니 결국은 다행. 건강상을 이유로 태프트가 1930년에 은퇴를 할 때 후버 대통령에게 자신의 후임자로 휴즈를 지명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땐 은퇴를 거부하겠다고 하였고 그 뜻을 관철시켰다. 자신이 휴즈에게 한 약속을 완전히 잊어버리지는 않은 듯 하다.[* 생각해보면 태프트는 휴즈가 중도에 대법관에서 나오지 않았다면 결과적으로는 약속을 철저히 지켰다. 대법원장 자리가 '비면' 올려주겠다고 했으니 말이다. 휴즈가 사임한 날짜는 1910년 6월 4일, 당시 대법원장이었던 멜빌 풀러는 1910년 7월 4일에 재직 도중 사망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